홍철기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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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철기 일지 http://www.hongchulki.com/; hongchulki at gmail dot com
by sonicluv


121119 일지

상품과 교환에 관한 짧은 소설. 공지영의 <의자놀이>를 읽다보면 가장 눈에 띠고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재능기부'라는 말이다. 재능기부라는 말에는 아마도 저자 공지영 자신의 것도 포함될 것이다. 작가로서의 재능과 이를 기부하는 매개체로서의 <의자놀이>. 더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가지를 분명히 밝히자면 나는 이와 같은 기획,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더 많은 청중에게 정치적 쟁점을 유포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어떤 지지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크고 작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내도록 예측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일을 벌이는 것'[그 개념의 원래의 의미에 적합한 행동(action)]에 대해서는 절대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과가 스펙터클할 필요는 없다...그렇게 된다해도 전혀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어떻게든 기존의 운동집단과 활동가 외부의 이질적인 청중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언제나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의자놀이> 등의 일련의 자유주의적인 진보주의자들의 행보에 대해 '진정성의 진정성', 혹은 '진심의 진심'을 문제삼아서 비판을 하는 것은 무력할 뿐만 아니라 비판자 자신을 고립시킨다고 말하고 싶다. 랑시에르가 브레히트의 비판적 극이론에 대해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만 유효하지 않다'.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이와는 다른 측면이다. 재능기부라는 말로 돌아가보자. 재능기부란 매우 흥미로운 말인데, 한편으로 기존의 등가교환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 그리고 엄밀한 의미의 등가교환이란 사실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마치 생태 위기와 기술의 실패가 "우리가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듯이. 재능기부란 실은 상품이 더 이상 교환가치로 정의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한계지점이다. 교환될 수 있다면 결코 '기부'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교환의 가능성과 교환가치는 그 대상인 상품의 내적 속성 및 그와 연결되어 있는 사회-기술적 연결망과 무관하게 이해될 수 없다. 즉 더 이상 교환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은 더 이상 그 교환가치를 지불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실제로 그 대상이 그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이 연결망과 무관하게 분리해서 교환가치를 매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환가치가 완전히 교란된 상황에서도 그 사용가치('재능'이라는 말로 포장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 대상을 '재능'이라고 부를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이는 교환이란 사실은 본질적으로 부등가교환이라는 점을 밝혀주는데, 재능이란 상품의 사용가치에 대한 적절한 대가는 노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재능, 혹은 노동이라는 상품 자체가 아니라 그 상품인 재능의 소유자, 혹은 노동의 주체의 삶의 조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대가가 어느 정도 적절하거나 덜 부당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등가교환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등가교환은 아마도 정화된(purified) 부등가교환일 것이다.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는 아마도 이러한 정화의 실천 체계, 혹은 헌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등가교환은 옳고 부등가교환(혹은 아마도 불확정적 교환?)은 부당하다는 식의 이분법을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즉 재능기부는 원래 부등가교환이므로 잘못되었다는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재능은 노동만큼이나 정확하게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다(그러다보니 노동시간이라는 척도가 필요했던 것이리라). <의자놀이>라는 거대한 재능기부 프로젝트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재능기부와 그에 수반되는 부등가/불확정적 교환 자체에서 온다기보다는 (왜냐하면 모든 교환은 그 결과가 불확실하다) 그 프로젝트의 주체와 지지자들이 '재능'과 '기부'라는 말의 의미를 너무나 액면가 그대로 확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곧 이어서)

121114 일지

미국의 작곡가 니콜라스 콜린스(Nicolas Collins)의 3일간의 하드웨어 해킹 사운드 워크샵이 무사히 끝났다. 사실 작곡가라지만 그는 David Behrman이나 David Tudor, John Cage, Alvin Lucier 등이 속하는 미국의 일종의 작곡가/발명가와 같은, 유럽의 작곡가와는 전혀 다른 전통에 속한다. 실험영화에 관한 어떤 전시의 도록 제목이 Poor Man's Expression이었는데, 이는 바로 이와 같은 미국의 작곡가/발명가 전통에 딱 들어맞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전후 유럽의 음악대학들은 테이프 레코더부터 아날로그 신서사이저까지 상당한 수준의 장비들을 갖췄던 반면 미국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 작곡가/발명가들은 '슈톡하우젠이 납땜인두를 들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moog와 같은 아날로그 신서사이저를 살 돈이 없었고, 그래서 인두를 들었고, 회로를 만들었다. 튜더의 <우림(Rainforest)>과 같은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실천의 결과물이다. 아이디어와 작곡의 세계가 오버그라운드라면 뭔가 기계를 직접 만들고 회로를 연결하고 해킹하고 망쳐놓는 실천들('해킹하고 망쳐놓는'이 사실은 어쩌면 더 중요한 부분일지 모른다)은 사실 진정한 언더그라운드에 속하는 일들이다. 이런 실천들이 그나마 오버그라운드로 올라올 때는 그들에게 과학자, 엔지니어와 같은 사회적으로 최소한 그 유용함을 인정받는 전문가의 자격이 주어지며 말끔한 실험실과 연구소가 주어진다. 위의 사진 속의 주파수(Zoopasoo)와 같은 환경이 아닌. 그러나 아마추어 엔지니어와 같은 실험음악가에게는 어떤 자격이 주어질까? 모르겠다. 여하튼 닉 콜린스가 속한 흐름, 혹은 전통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요즘 융복합 예술이다 떠들면서 무슨 최첨단 하이테크 예술가로 추앙받는 분위기인 백남준도 사실은 이쪽에 속한다고 본다...이번 워크샵에서 했던 것처럼 카세트 테입의 헤드를 분리해서 전선에 납땜을 하고 벽에 붙인 자기테이프 위로 손으로 달리게 만든 것이 바로 백남준이었던 것이고. 그게 디지털 시대가 되었으니 하이테크나 스마트폰 같은 걸로 다르게 이해해도 좋다고 마음대로들 생각하는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런 워크샵은 단지 시대에 뒤떨어진 것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판단은 각자가...). 그래서 결국 차선책으로 선택했던 로라이즈에서의 워크샵은 사실 워크샵의 성격에 정말로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교수로 재직중인 학교에서 제공하는 연구비로 일종의 연구/워크샵을 위해 한국에 손수 오겠다는 이 아저씨를 오지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일단 내 일을 덜고자 큰 기관에 의사를 타진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 상태에서 한 달 정도가 흘렀다. 결국 이런 일들에서 직접 나서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교훈이다. ANT식으로 말하면 네트워크는 수행적인 것이라 직접 수행을 하지 않으면 네트워크는 자동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공항에 마중을 나갔을 때, 게이트로 나오는데 한참 시간이 걸리길래 혹시 전기/전자부품들을 들고 들어오는데 문제가 있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이 노신사(이러한 음악의 바닥의 기준으로만 봐도 충분히 노신사이다)는 "언제나 정장에 넥타이를 하고 있으면 문제가 없다"는 자신의 스승 앨빈 루시에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워크샵 내내 참가자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그 자체가 일종의 musicircus이자 improvisation meeting이었다. 마치 작곡된 즉흥처럼 참가자들은 처음에 아무 소리도 내지 않다고 결국에는 여기저기서 전자음과 소음이 나오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마치 하나의 노이즈 오케스트라처럼 폭발하기에 이른다. 워크샵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일종의 관찰자(그리고 점점 더 보조강사)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즉흥음악과 노이즈음악은 절대로 무대 위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닌 것이다. 아마도 2-3년 후에 다시 한 번 더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일단 닉 콜린스의 80년대 작품 하나.


그리고 그가 '이미 그가 모든 것을 다했다'고 칭송하는 그의 스승인 알빈 루시에의 대표작






그리고 전에도 소개했었던 스위스의 노이즈 듀오 Voice Crack의 다큐멘터리 푸티지. Voice Crack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닉 콜린스와 서울의 작은 즉흥음악씬을 연결시켜주는, 그러나 이미 그 자체로 너무나도 위대한 모두의 공통 분모이다(심지어 메탈 밴드 sunn o)))의 멤버와도 연결시켜주는).

121112 일지

"우리는 반드시 모순에 빠지게 마련이고 그 모순에서 성급히 벗어나려고 아등바등해서는 안 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두 입장을 동시에'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건 사리에 어긋납니다. 과학은 과학에 어울리지 않는 이 모든 일과 분리되어야 합니다"라고 곧장 외치고 볼 일이 아니라는 거지요. 이것이 내가 학생들이 받아들이기 바라는 가장 중요한 생각입니다. 너무 성급하게 어느 편에 서지 않으면서 이 모순, 이 이중의 담론을 검토 대상으로 삼읍시다. 느긋하게, 진득하게. 나는 학생이 뛰어넘을 수 없는 듯 보이는 모순 앞에 곧장 머리부터 들이밀지 않고, 도리어 그 모순 자체를 검토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공부를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브뤼노 라투르,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25쪽.

이건 단순히 과학기술사회학과 같은 분과학문에 속한 학자의 말이라기보다는 정치철학자의 말이다. 물론 그의 입장과 발언을 과학기술사회학과 같은 구체적인 분과와 전혀 무관하게 이해한다면 많은 것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분과에 한정해서 이해하는 것도 무의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뜻에서 내가 그를 정치철학자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 정치철학은 공동체의 공공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는 장르로서의 정치철학이 아니라 근대적 분과학문들의 공통의 맹점, 공백, 간극에 붙여진 여러 이름 중 하나인 '정치적인 것'을 다루는 철학이라는 의미라고 해야할 것이다.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나를 계속 인도하고 또한 혼란에 빠뜨린 것은 바로 위의 문장에 '과학'에 위치에 '정치'를 대입하면 나오는 말에 대한 문제시였기 때문이다. '정치는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 이 모든 일과 분리되어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우리의 시대에 정치를 정치와 어울리지 않는 것과 뒤섞는 일은 포퓰리즘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포퓰리즘은 단순히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긋하고 진득하게 검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모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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