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철기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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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철기 일지 http://www.hongchulki.com/; hongchulki at gmail dot com
by sonicluv


120403 일지

관객의 언어를 대신하는 전문가와 평론가의 언어는 이성의 언어와 숭배의 언어로 점철되어 있다. 혹은 관객의 언어는 전문가의 이성의 언어와 팬덤의 숭배의 언어로 양분되어 있다는 편이 더 나은 구분인지 모르겠다. 물론 양분되어 있더라도 둘은 충분히 결합되어 있을 수 있는데, 복지국가나 백남준처럼 이성적 평가의 대상이 우리로부터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그 숭배의 대상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라도 여전히 숭배의 대상인 것이 우리와 그, 혹은 그녀, 그렇지 않으면 그것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가 만들어내는 그 대상의 권능이 자비롭게도 우리에게도 미치는 것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숭배의 언어는 이 거리를 최대한 좁히고 싶어하지만 이성의 언어는 이 거리를 정당화한다. 나는 이 두 가지 언어가 드보르가 말하는 스펙터클의 구조, 즉 '분리 속의 통일성, 통일성 속의 분리'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그 대상이 스펙터클인 한에서 우리는 그것에 아무리 가까이 다가간다고 해서 그것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이미지로 매개되는 사회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로부터 거리를 취한들, 혹은 거리가 존재한다고 아무리 깨우쳐주려고 한들 성공할 수 없다. 그것이 스펙터클의 힘이며 동시에 시각적인 것에 의해 매개되는 관계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에 대한 좌파와 우파의 비판은 모두 이런 점에서 브레히트의 패러디처럼 보인다. 랑시에르가 지적하듯이 브레히트의 방법은 관객들에게 '거리의 사실'을 계몽하려 한다. '당신과 당신이 보는 무대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나는 브레히트의 방법이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것 이상의 정치적 힘을 가진다고 보지만, 여전히 거리에 대한 계몽을 지적하는 데에 있어서는 랑시에르가 옳다고 본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실은 실재가 아니라 재현된 것에 불과합니다.' 포퓰리즘 비판의 경우에 있어서는 '당신이 보고 있는 민주주의는 대의된 것입니다.' 반대로 숭배의 언어는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실은 재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포퓰리즘의 경우에 그것은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대의될 수 없는 민주주의입니다'라고 표현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스크린쿼터제의 유지를 옹호하면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박찬욱이 말한 "전지현은 대체될 수 없는 상품"이라고 말한 이 딜레마를 떠올리곤 한다. 상품인데 대체될 수 없다니. 박찬욱 감독이 상품의 의미를 모르고 이러한 말을 했을리 없다고 생각한다. 재현될 리가 없지만, 그럼에도 또한 너무나 잘 재현되고 있는 어떤 것. 그것이 스펙터클일 것이다. 반면 (랑시에르 식으로 말해서 "해방된") 관객의 언어(그리고 그 언어의 주체인 민주주의의 주체, 혹은 주체되는 주체[subjected subject])는 이 두 가지 언어와 결별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언어의 대상은 어떤 조건에서는 당연히 재현될 수도 있지만, 또한 동시에 다른 조건 하에서는 재현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라투르가 말하듯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 환원가능하지도 않지만 환원불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처럼.

그리고 작년에 한국에도 왔던 제이미 앨런과 그의 동료들이 편집하는 웹진 continent에 내가 주로 쓴 나와 이행준의 협업에 관한 짧은 글이 영어로 발표되었다.

120401 일지

비전문가를 위한 언어가 없다. 관객의 언어가 없다. 내가 최근 한 지인의 평론글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든 생각이었다. 한국의 예술의 전문가들은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용어를 사용하기를 즐긴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용어를 사용한 담론을 만들어내며, 또한 만들어내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정작 관객은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고 그것을 옆사람과 떠들만한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공연이 끝나고 대담을 하면 언제나 날라오는 객석의 언어는 관객의 언어라기보다는 관객을 가장한 전문가의 언어, 그리고 그 전문가의 언어를 충실히 따르는 학생의 언어다. '내가 이런 걸 좀 아는데, ...'라거나 '제가 잘은 모르겠지만...'이라고 표현되는. 혹은 어떤 질문보다는 그 질문의 맥락을 이루고 있는 온갖 사례들(아카데미에서는 이것을 '선행연구'라고 부른다)이나 이론적 배경을 먼저 2-3분 이상 설명하는 방식의 언어. 그것은 아카데미의 언어이며, 아카데미에서는 당연히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나는 여하튼 이런 언어를 사용하도록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보니 더욱 민감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관객의 언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사이에 나는 이 객석의 언어를 관객의 언어라고 크게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착각은 관객에 대한 모종의 적대감이나 경멸감과 연관되어 있었다. 마지막에는 '차라리 말을 하지 말자'거나 '떠들지 말자'는 결론에 도달하기 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관객의 언어가 아니다. 실상 관객의 언어는 아직 없다. 혹은 있지만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그 사이에 들려 온 것은 관객에게 주입된 전문가의 언어, 무대 위에 앉은 패널의 언어이다. 혹은 객석으로 자리를 옮겨서 앉은, 실은 관객이 아니라 전문가 평가단, 혹은 심사위원의 언어다. 그것은 공연을 보고 뒷풀이에서 오늘 본 공연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언어도 아니고, 집에 돌아가서 블로그나 트위터, 페이스북에 포스팅하게 될 그런 언어가 아니다.


Takahiro Kawaguchi, Choi Joonyong duo performance at confucian temple in Suncheon by Yeosu-MBC broadcasting station from donquixote on Vimeo.


최근에 업데이트된 여수MBC의 푸티지. 작년 8월에 있었던 최준용과 타카히로 카와구치의 순천향교에서의 야외공연을 취재한 영상이다. 아나운서가 "자유즉흥음악"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놀랍고, 다른 한편으로는 손발이 오그라들정도로 어색하다.

111028 일지

지금도 아방가르드 예술을 옹호한다는 것은 마치 현실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것,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옹호하는 것처럼 시대에 뒤떨어지고 낡은 어떤 입장으로 보일 것이다. 사실 나도 아방가르드 예술을 진정으로 그것이 뜻하는 바로 접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남들보다 뒤에 남은 지하의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어떤 것으로 경험했었다. 이 간극은 정확히 '전위 정당'과 '전위 예술가'에게서 '전위'라는 말의 뉘앙스가 보여주는 차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두 가지 모두의 의미에서 '전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시대는 끝이 난 것 같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와의 유비로 말해보자면,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어찌보면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 마찬가지로 전위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으로 전위적이라는 것.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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